마중물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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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문 제출

  

<마중물세미나 28학기 3강 발제문>

 

시민의 권리 : 어떤 신분의 시민의 권리인가

 

25.4.13 / 최규현

 

시에예스는 제3신분을 구속되고 억압된 전체이되, 특권적 신분이 없으며 자유롭고 번성하는 전체로 규정했다. , 시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제3신분인 것이다. 3신분이 완벽한 하나의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그 무엇이 되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국가가 존립하기 위한 구성원들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률의 테두리 안에 있어 자유롭게 보이지만 실상은 특권적 신분에 의해 구속되어 있고 억압되고 있는 존재이다. 대표적으로 1988년 유전무죄 무전유죄<지강현 600만원 절도 17(자살). 전경환(전두환 동생) 수십억 사기횡령 징역 7(2년 후 가석방)>, 국힘 곽상도의원 아들 50억 뇌물 무죄, 버스기사 800원 횡령 해고이다.

 

"위임권을 행사함에 있어 위임자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위임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중략)...나의 두 번째 근거는 직접적이다. 어떤 영역에서든 한계가 없는 자유나 권리는 있을 수 없다."(p.43)

 

우리는 국정운영을 위해 윤석열에게 위임권을 행사하여 대통령 자리에 앉게 하였다. 하지만 명태균게이트를 잠재우며 본인의 잇속과 무한대의 절대권력을 누리기 위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위임자인 시민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자유를 침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지난 44일 윤석열의 독재정치를 위한 12.3 비상계엄의 결말로 탄핵당했다. 위임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도 헌법을 충족시키는 범위 안에서 권리를 행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시민권을 되찾기 위해 거리로 나선 시민들은 진영싸움으로 변모되어 양갈래로 분리되었고 마치 의도된 것처럼 제3신분의 권리를 위한 제1신분과의 투쟁이 아니라 제3신분 사이의 권리 찾기로 변질되어 버렸다.

두 진영의 시민들은 모두 각자의 철학은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철학과 개똥철학. 나도 모르게 학습(學習)이 아니라 습학(習學)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치의 삼각형이 떠 오른다. 시민들이 올바른 철학(시민권)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세상읽기를 하며 자신을 정제시켜 나가야 건강한 세상만들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되기에 비극이기도 하고 희극이기도 함을 잊지 말아야겠다.

 

"우리가 무엇을 행했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인식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p.108)

 

이번 12.3 비상계엄을 통해 시민들은 - 우리들의 권리, 시민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자기 목소리로 공동체에 참여하여 권리와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 - 명확한 부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광화문 거리로 나서 시민의 권리를 외치고 또 외쳤다. 절대권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행동으로 실천된 모습이었다. 이 모습은 전 세계가 알게 되었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명하게 되었으며 군사정권의 나라들은 대한민국을 부러워했다.

비상계엄의 잔재는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어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러한 과거의 44일까지의 행동은 내일부터 펼쳐지는 미래, 두 번 다시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시민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잡을 수 있게 조타수가 되었기에 12.3 비상계엄부터 4.4 탄핵 시점까지 단순히 지나간 행동의 과거로만 치부하여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을 보면서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프랑스 대혁명의 유사한 현대판으로 보여진다. 왕권을 가진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막기 위해 귀족층인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반기를 들었고, 프롤레타리아트(상퀼로트)인 시민들은 거리로 나서 민주주의 형태의 집회로 저지하였다.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이득은 누가 얻었을까? 다른 각도로 얘기해 보자. 누가 가장 손실을 줄일 수 있었을까? 루이 16,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지가 혜택을 얻었다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국회의원들과 대기업들이 손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230여년의 시간이 흘러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시에예스는 다른 신분들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한히 잘 되어갈 것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인류가 존재하는 한 풀 수 없는 숙제로 남을 것 같다.

시에예스가 <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저서 할 당시에는 정치적 불평등이 시급한 문제였지만 오늘날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시급한 문제이고,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상황이다. 누워있는 시에예스를 깨워 이 주제로 마중물에서 강의를 요청하고 싶다.

 

 

 

 

 

 

 

 

 

 

 

 

 

 

 

 

 

 

 

 

 

 

 

< 프랑스대혁명 원인과 전개과정 >

 

16세부터 신대륙에서 막대한 은이 유럽 대륙으로 공급되며 경제 전반에 가격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상인 계층들이 소유한 부의 크기가 급상승하였다. 이 시기를 상업혁명이라 하며 이때 큰 돈을 벌었던 부유한 자본가 계급을 부르주아라고 불렀고 이들의 부가 전통 토지 귀족의 부를 넘어서며 그들의 신분적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 혁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부르주아는 원래 장원과 장원 사이를 오가며 무역을 하는 사람들을 부르크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성안의 사람들이라는 말로 부유한 계층을 말하며 부르크가 성, 마을을 말하는 고유 명사가 된다. 독일어계 마을은 아우크스부르크, 브란덴부르크 등이 있고 프랑스로 가서 부르크 단어가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시민 혁명이라고 부르는 진정한 의미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프랑스 혁명은 초기엔 우리가 생각하는 민중 혁명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부터 절대 왕정을 추구하며 막대한 돈을 들여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7년 전쟁(1756~ 1763) 등으로 재정 파탄에 이른다. 베르사유 궁전 건설은 루이 14세 때 일이고, 7년 전쟁은 루이 15세 때로 혁명을 당한 루이 16세가 억울할 수도 있다.

 

따라서, 프랑스는 루이 16세부터 엄청난 재정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세금을 어떻게든 더 징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루이 16세는 영국을 견제한다며 미국 독립 전쟁(1775~ 1783)도 재정 지원을 하는 등 프랑스 재정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게다가 1785년부터 프랑스에 흉년이 거듭되었고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걸이 사건이 일어나 당시 시민들의 민심이 더욱더 최악으로 치달았다.

왕비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사치를 안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프랑스 왕비에 비해 과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 출신 왕비로서 그렇게 자유로운 상황이 아니었으나 혁명 당시 민중 분노의 희생양이 되었다.

 

특히 왕비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은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 술 마시려 빵을 찾다가 브리오슈를 안주로 했다라는 1770년에 출간된 내용으로 왕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임에도 프랑스 왕국 왕정 폐지의 정당화를 위한 프로파간다로 쓰이며 모함당한다.

 

한편 루이 1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 계층을 견제하기 위해 매관매직을 통해서 부르주아들을 귀족 층(대검 귀족)에 편입시켜 힘을 키워주었다. 하지만 루이 16세 때 이것이 발목을 잡게 된다. 왕권이 강하고 부르주아 계층의 힘이 약했다면 세금은 왕의 절대적 권위로 명령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루이에게는 그럴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재정 총감 드칼론은 일반 시민 계층만으로는 세금 징수가 부족해 귀족 계층과 성직자를 포함한 특권 계층에게 임시로 과세를 하자는 제안을 한다. 당연히 특권 계층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고등 법원의 권한을 통해 임시 과세안을 막으려고 시도하였다.

 

루이 16세는 특권층에 대립하였던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편이라 착각해 본인들의 의석수를 2배로 늘려 달라는 부르주아 계층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부르주아들은 본인들에게 유리한 11표제를 주장하는 삼부회 안을 제시하였고 귀족 층과 고위 성직자 계층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삼부회가 흐지부지 끝나자 부르주아는 단독으로 국민의회를 만들어 영국식 의회 정치를 선언한다.

 

루이 16세는 깜짝 놀라 삼부회 회의장을 군대를 동원해 폐쇄한다. 이에 부르주아들은 620일 테니스 코트장에서 국민의회의 헌법 제정이 될 때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맹세를 한다. 여기에 시에예스와 일부 성직자들과 라파예트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귀족들이 국민의회에 합세를 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루이 16세도 어쩔 수 없이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전 신분 계급들이 참여하는 헌법위원회를 창설하고 본격적인 헌법 제정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원래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이 기존 귀족들과 성직자 계층의 특권(앙시앵 레짐 : 구체체 모순)들을 몰아내고 왕권 또한 의회를 통해 제한하려는 시도다.

 

초기 민중 봉기는 1795년부터 거듭되는 흉년으로 식량 부족과 물가 상승이 지속돼 이에 대한 불만으로 시위를 연 것이지 계급 혁명적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국민의회를 지지하기 위한 민병대가 무장을 위해 바스티유 감옥의 무기를 탈취한다는 소문이 돌자 분노한 민중이 먼저 바스티유 감옥으로 간 것이다.

 

프랑스는 현재 이날을 기점으로 대혁명을 기념하고 있지만 초반에는 부르주아 계급 혁명과 민중 봉기가 전혀 관계성도 없이 따로 놀고 있었다는 것이 팩트이다. 이후로 부르주아 세력들이 그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민중 봉기의 힘을 부추기고 활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민중과 농민 봉기가 그들의 예상과 달리 매우 폭력적이고 급진적으로 흐르자 국민의회는 영주에게 받치던 부역과 상속세를 폐지하는 등 커지는 민중의 분노를 달래려고 봉건제 폐지 내용을 포함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을 대표하는 상퀼로트들을 중심으로 보다 폭 넓은 민중들에게 시민적 권리를 가지도록 국민의회에 압력을 행사하며 그들의 지지를 받는 급진파 개혁 세력들이 힘을 얻어 대거 국민의회에 진출하며 실질적인 민중 혁명 성격을 띠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