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세미나 28학기 7강 발제문〉
『공산당 선언』 - 마르크스의 권리와 연대를 중심으로
25. 6. 8 / 김은선
1.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 권리와 연대를 향한 여정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독일에서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가정에서 성장했다.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지만 점차 역사와 철학에 매료되어 헤겔 연구에 몰두했고 이는 부모와 신부의 우려를 낳았다. 그는 관념 속 이념을 강조한 플라톤을 비판하며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에 공감했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는 청년 헤겔과의 만남 그리고 헤겔 좌파로 불리는 박사클럽 활동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1841년 프로이센의 정치 변화와 문화정책의 후퇴는 마르크스의 학문적 진로를 가로막았다. 후원자의 사망과 동료의 퇴출로 대학 진출이 어려워지자 그는 언론 활동에 나섰고 언론의 자유를 “민족정신의 열린 눈”이라 표현하며 자유로운 사유의 가치를 강조했다.(p.133~137)
정부의 검열은 심화되었고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다. 마르크스는 사상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엥겔스를 만나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인간 사회를 경제적 조건과 계급투쟁으로 이해하는 ‘역사 유물론’을 정립하게 된다.
파리에서의 급진적 활동은 프로이센 정부의 압박으로 이어졌고 마르크스는 벨기에를 거쳐 1849년 런던에 정착했다. 극심한 빈곤 속에서도 그는 『자본론』 집필에 몰두하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인간 소외를 분석했다. 그는 자본주의 극복의 길을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혁명에서 찾았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국제노동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그는 제1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비록 생전에 공산주의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이후 전 세계 사회운동과 비판적 사유의 중요한 지침으로 남았다.(p.138~143)
2. 과거와 현재를 꿰뚫는 사상의 눈
“우리의 위치에 대한 의식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사상의 독수리 눈으로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p.137)
나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말처럼 ‘사상의 독수리 눈’으로 역사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고 믿는다. 왜곡된 과거는 현재를 흐리고, 흐려진 현재는 미래를 가로막는다. 역사는 단순한 기억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다. 세계 곳곳의 저항과 해방의 기록은 이를 증명해왔다. 베네수엘라의 ‘산을 옮긴 사람들’ 이야기, 즉 다큐멘터리 《베네수엘라는 어떻게 산을 옮겼나》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국민 다수가 빈곤에 시달리던 시절, 차베스 정부는 석유 자원을 국유화하고 무상 주택을 제공하며 진정한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 했다. 꼬무나(공동체) 운동의 리더였던 마두로는 민중 스스로가 권력을 운영하도록 공동체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그러나 이런 역사는 끊임없이 왜곡되고 지워진다. 오늘날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 특히 ‘국민의힘’은 이런 역사적 실천의 맥락을 지우고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를 절대시하며 노동자와 민중의 연대를 희화화한다. 이들은 친일과 독재의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며 ‘기회의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구조적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다.
32년차 보건노동자로 일하며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갈등을 목격하고 때로는 그 안에서 직접 부딪히며 살아왔다. 환자의 생명을 돌보는 공동의 목적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종 간 위계는 일상적으로 존재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대우 차이는 마치 계급처럼 고착되어 있다. 같은 병원, 같은 시간, 같은 현장에 있어도 누군가는 권리를 보장받고 누군가는 존중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 간의 연대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현실이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서문에서 말한 “우리는 현실 자체에서 이념을 찾겠다.”는 선언에서 다시 상기되었다. 이러한 나의 경험을 반추하며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노동의 현장, 그 속의 모순과 구조 속에서 진정한 연대와 권리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3.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전체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p.106) 병원은 신성한 돌봄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차별의 질서’를 경험한다. 의사와 간호사,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간병인과 보조 인력 사이에는 분명히 위계가 존재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은 우리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이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자본은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과 분열을 심어놓았고 마르크스는 이를 “착취 계급이 피착취 계급을 분열시키는 구조”로 분석했다. 우리의 현장은 바로 그 구조 속에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태도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구조의 문제이다.
이러한 구조적 분열은 최근 정부의 졸속적인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의료 인력 부족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 아래 추진된 정책이지만 병원 현장을 경험한 노동자의 시선에서 보면 이 정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 채 또 다른 갈등만을 양산하고 있다. 의사와 간호사의 갈등, 수도권과 지역 간 의료 자원의 불균형,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료를 둘러싼 불신과 불안은 모두 환자와 노동자, 즉 시민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분노를 각자 품은 채 고립되어 있다. 정부 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가 분명히 현장 노동자들과 시민에게 전가되고 있음에도 노동자와 시민은 ‘함께’ 분노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한 오해와 혐오 속에서 분열된다. 마르크스는 이런 상황을 꿰뚫어보며 말했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중략- 프롤레타리아는 이처럼 계급으로 또 이를 통해 정당으로 조직되지만 그것은 노동자 자신의 경쟁으로 매번 다시 파괴된다."(p.29)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통찰이다. 보건노동현장에서 내가 경험한 노동조합 탄압과정에서 억압과 노·노 갈등(의사와 간호사, 정규직과 비정규직), 공공병원과 민간병원, 도심과 지방 등 모든 분열은 자본과 권력이 책임을 회피하고 갈등을 전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 진짜 적인지 보지 못하고 옆 사람을 원망하게 만드는 구조,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기이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장 노동자’와 ‘시민’의 ‘연대’이다. 병원은 우리 모두의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공공의 공간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정책 실패의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간다. 의료는 상품이 아니다. 생명은 계산될 수 없다. 이 절박한 진실을 함께 말하고 함께 바꿔야 한다. 노동자와 시민이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일, 그것이 바로 연대의 시작이며 단결의 가능성이다.
4. ‘단결’은 실패한 이상이 아닌, 오늘의 과제이다
『공산당 선언』은 말한다. “노동자의 투쟁에서 진정한 결과는 직접적인 성공이 아니라, 단결의 확산에 있다.”(p.29) 1987년 민주화운동, 노동조합 설립, 촛불항쟁, 이 모든 역사적 순간들은 단결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꿔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자들은 다시 흩어지고 있다. 자본은 우리를 서로 경쟁시키고, 감시하게 만들고, 고립시킨다. 병원 현장에서 간호조무사는 간호사의 눈치를 보며,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으려 애쓴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경쟁이 단결을 무너뜨리는 구조”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말한다. “이 조직은 더욱 강하고, 더욱 견고하고, 더욱 강력한 형태로 항상 다시 일어선다.” 우리의 투쟁은 단절되지 않았다. 사라졌던 것이 아니다. 단지 다시 일어설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5. 이제는 ‘구조’를 직시해야 할 때
정부는 별 대책 없이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로 인한 혼란과 피해는 모두 현장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 피해 앞에서도 우리는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를 탓한다. “의사들의 밥그릇 싸움이지”, “간호사는 왜 우리가 불법의료하고 있나”, “정규직은 비정규직보다 월급 많이 받잖아”... 이 모든 분열은 자본과 제도가 만들어낸 구조의 산물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자기 삶의 주인이자 타자와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로 보았다.
이제는 이 구조를 직시해야 할 때이다. 개인의 성격, 태도, 노력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연대하라, 단결하라, 너희는 잃을 것이 쇠사슬밖에 없다”고 외쳤다.
우리는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있고 함께라면 그 권리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뜨겁고도 절실한 유산이다.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인류의 첫 공동체 사회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지금의 사회에서 우리공동체가 인간의 본성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가기 위해서 공동으로 해결하여야 할 우선적 과제는 착취와 지배를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탐욕적 제국주의 전쟁도발 책동”이다. “당면의 내란내전책동, 친일·친미 쿠테타 세력의 부정의한 역사를 깨끗이 청산하는 것 또한 그의 일환”이다. 어느 시민·노동운동가 선배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발제문 마지막으로 『공산당 선언』 제 1장을 마치며 마르크스가 외쳤던 구호를 함께 외쳐본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